1. 내 추억의 80년대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의 80년대는, 아침조회 때 애국가에 맞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며 매일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일주일에 한번 있는 교장선생 조례 때는 박통 시절에 훈시된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고, 한달에 한번씩 민방위 훈련을 하고, 방학 때는 새벽에 새마을운동(아마도) 청소를 나와 동네의 정해진 구역의 청소를 했었던 시절이었다.
내가 겪은 서울 북부의 80년대 중반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폭도들이 점거하였으나 우리의 군경이 일당을 소탕하였던' 광주를 그린 뉴스는 심심치 않게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왔지만, 일년의 365일 나의 집 텔레비전의 뉴스의 첫머리는 언제나 "오늘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으로 시작했었다.

'괴뢰군' 장교출신으로 남한에 남아 꾸준히 정부의 감시를 받고있던 나의 아버지는 그 당시 열성적인 민정당 당원이셨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지만, 남북이 갈린 후 월북하셨고, 부모님은 제대로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다. 연좌제. 일자리를 잡기도 힘들었음은 물론이다. 사업을 하기 위해 아버지는 남보다 더한 정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보여야 했다. -우리 집에는 언제나 민정당의 선전물이 넘쳐났다. 국민학생이던 나는 처참하고 잔혹한 광주의 사진들이 인쇄된 붉은 유인물 한가운데에 선정적으로 조박되어있던 "이 사진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작사진들이다"라는 문구를 기억한다. 10대의 나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고,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했으며, 민방위 훈련을 했었다. 가끔 미그기를 가지고 월남한 이북군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거나, '깨스!'라고 소리치며 실내화 자국이 어지럽게 찍힌 복도 구석에 배를 대고 개구리처럼 엎지는 훈련을 하는 일이 당연했었다. 대부분 괴뢰군 출신들의 가정이 그러하듯 남한의 남자로 태어나 신분상의 문제로 남한에서는 장교가 될 수 없었던 나의 오빠도 그런 학창시절을 보냈음이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한 때에 사회뉴스의 한켠은, 젊은 여성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87년을, 무악재 고개에 스크럼을 짜고 대열을 만들고 있었던 연세대 학생들의 해로 기억하고 있다. 그 해에, 나는 처음으로 '백골단'을 보았었다. 청회색 유니폼에 트레이드마크인 하얀 모자와 기묘한 마스크를 쓰고 나를 스쳐 지나간 군인들. 터지는 최루탄에 눈물을 닦으면 눈이 더 아프다는 노하우를 전해들으며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한고개 너머에서 아들딸뻘의 대학생들의 뼈가 곤봉으로 부서지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 87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몇몇 도망친 대학생들이 (당시 내가 다니고 있던) 홍제동 성당에 숨어들었다더라. 큰 신부님이 철문을 닫아걸고 학생들을 내주지 않았다더라. 군인들이 성당문을 부수고 강제진입했다더라 라는 소문과 함께.


2. 내 추억의 80년대가 말하던 사회정의

여자가, 몇명 죽어 나갔다. 70대 노인부터, 10대의 아이들까지. 우리의 80년대에서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직 당사자의 가족과, 경찰과, (살아있거나/혹은 죽었거나) 가해자(혹은 복수(複數)의 가해자들)이다.
우리의 시선은 이토록 사회의 약자로부터 한걸음 빗겨나가 있었다. 기억하는가. 우리의 파출소 입구마다 붙여있던 경찰 표어는 '시민의 안녕'이 아닌 '정의사회구현'이었으며 '법질서확립'이었다.
우리의 강인한 법질서에 의해 구현된 정의사회는, 북한괴뢰군의 침략에 대응하여 민방위 훈련에 골몰하던 사회였다. 대낮의 거리에서 사이렌과 함께 달리던 자동차가 갑자기 멈추고,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그림자가 되어 몸을 숨겼다. 한달에 한번씩 가열찬 등화관제 훈련을 통하여 암흑을 만들던 시대. 나의 안전을 위해 내 집의 문을 닫고 내 장소의 셔터를 내려,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불빛을 가리며 안도하던 그런 사회였다.

하수구에 처박힌 젊은 여성의 시체. 벌레가 온 몸에 들끓고 있는 그 여자가 살아있을 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답은, 마지막에서 여중생의 죽음이 변(辯)해주고 있다. 학교의 민방위 훈련에 입은 '틈(상처)'에 형사가 붙여준 반창고와 함께 사체가 되어 돌아온 어린 여중생의 사체가. 꼬챙이에 꿰인 고깃덩이 마냥 아직 젖살이 포동한 아이가 팔다리가 묶여나갈 때, 따뜻하게 살아있고 숨을 쉬던 '인간'이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정말로 고깃덩이로 일변해버릴 그 때에 - 우리는 사회의 정의와 안위를 위해 사이렌 소리에 맞춰 불을 끄고 셔터를 내렸다. 사회와 정의라는 대명제는 시골의 어린 중학생(들) 따위 보다는 언제나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 밥숟가락과 면도칼에 도려내어지는 사회적 약자들 보다 좀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반공이념으로 구체화된 계몽주의에 점철된 공포의 사회는 일반인에게 진짜 '인간'이 가진 공포의 의미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쩌면 이 사회가 품고 있는 불온한 살기(殺氣)보다 더한 살기가 또 있었을까? 눈 앞에 들이대어진 이 거대한 살기의 공포 앞에서, 우리는 문을 내리고 창을 닫고 불을 끄고, 인위적으로 조형된 등화관제의 암흑 속에서 자기 몸 하나 비집고 들어갈 좁디좁은 움으로 들어가는 쥐새끼처럼 최대한 작게 움츠러들면 되었다. 셔터를 내려라. 문을 닫고. 불을 끄고. 귀를 막고. 눈을 감아라. 사회의 살기는 우리를 계몽시킨다.

「내 집의 셔터를 닫기만 하면 된다. 나만 살 수 있으면 그만 아닌가?」


3.「살인의 추억」- '개인'을 향한 연민

이 영화는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는 소위 '스릴러' 영화의 형식적인 껍질을 뒤집어 쓰고 있음에도 범인을 밝혀내지 못하는, 실제의 '사회정의'를 구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농촌 스릴러'라는 감독의 말이 우습지 않게도 황금빛으로 농익은 벼이삭이 넘실거리는 들녘에 이질적인 반라로 전시된 여자의 사체를 몇 구나 늘어 놓았음에도 결국 주인공인 형사(들)은 패배했다.

386세대인 봉준호 감독은 정치적인 언급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당시의 사회를 우회적으로 술회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가 한창 유행하던 대로 노란 이소룡 옷을 입은 짜구난 젊은 남자들이 원숭이처럼 날뛰는 '낭만의 시대'로 80년대를 회고하는 영화였다면 400만명의 관객이 귀신이라도 들린 듯 극장을 향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나 역시 미쳤다고 이 영화를 위해 극장표를 몇번이나 예매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폭압과 공포의 시대에 청춘을 지나쳐온 그는 자신의 정치성도, 하다못해 추억어린 다정(多情)조차도 그리고 있지 않다. 소품들은 잔뜩 나열했지만 정작 작가(감독) 자신의 실체는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당시 사회의 '(범인 이외의) 특정한 그 누구'도 특별히 비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80년대에 조금도 빚지고 있지 않다는 냉정한(나쁘게 말하자면 비겁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국의 400만의 젊고 평범한 주관객층을 극장으로 향하게 만들었을 때는, 분명 어떤 아우름의 마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마법의 코드(code)는 일견 '코믹함이 곁들여진 스릴링'이다. 그러나 결국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대를 아우르는 장르와 스토리텔링과 섬세한 미장센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자리한 '살기어린 사회 폭압에 의한 개인의 비애'이다. 그는 '비난'하고 있지는 않지만 놀랍도록 제자리에서 응시하고 있다. 포커스는 결국 '폭압당한 개인'에 분명히 맞춰져 있는 것이다. 싸늘히 시신이 된 여성들도, 얼굴이 일그러지고 정신이 올바르지 않다는 이유로 범인이 '된' 백광호도, 손이 부드럽고 음악을 좋아하고 수줍음이 많아서 사람과의 교류가 없다는 이유로 범인이 '된' 박현규도, 과학수사와 서류를 믿던 서울 촌뜨기로, 한번도 경험한 바 없는 고즈넉한 시골마을의 참상 속에서 구겨 찢어버린 박두만의 수첩 안의 '수많은 얼굴들'처럼 냉정한 심상이 일그러져 버린 서태윤도, 모두.
방관자였던[일 수 밖에 없었던] '시대'를 동정하거나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가해자이자 방조자이자 피해자였던 '개인'을 응시하고 연민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를 향한 386세대의 부채의식(負債意識)을 동정(同情)과 죄책감으로 표현하지 않은 봉준호의 '차가움'에, -그것이 냉정함도 동정심도 정의감도 아니었음에, 외려 나는 깊은 감사를 느낀다.
어쩌면 나 역시 치열한 사회의식이 결여된 '이후 세대'의 시각으로 80년대의 그 사건을 '추억'하며 구경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지 '즐기'기에는, 이 쿨(cool)한 영화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의미는 너무나 무겁다. 청산하지 못한 선대의 빚처럼 남아버린 사건. 추억하는 자가 있다면 기억하는 자도 있어야 한다.
그것을 잊지않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통하여 감독이 꼭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의 순기능" 중 하나는 적어도 어느정도는 완성된 것이리라.



*덧/① 한국영화의 '연기'를 논하고자 할 때, 이렇게 나눈다는 설이 있다.
"살인의 추억" 전(前)과, "살인의 추억" 후(後)
모든 연기자들의 연기가 전반적으로 질이 높다는 것을 놓고 볼 때 사실 지금까지 본 어떠한 영화와도 달랐다는 것만은, 말하고 싶다.

  ②누군가가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를 패러디 했다.
"너는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후회해 죽는다.."

  ③최초의 살인이 86년이며 유재하의 앨범이 87년에 발매되었던 것과, 경찰서의 220볼트선이 유이(唯二)한 옥의 티로 지적되고 있는데, 감독의 말에 따르면
"미술부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 220볼트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그렇게 따지면 애매한 게 많이 있다. 첫 사건이 난 시기가 86년인데 '우울한 편지'는 앨범이 나온 시기가 87년이다. 86년부터 91년까지 일어난 사건을 87년에 집약시키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다."
결국 '실수'는 아니었다는 얘기였다.

  ④나는, 실제 범인이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정신병질적인 살인범이 '정상'적인 사회 안에서 캬멜레온처럼 (살인을 멈춘채) 살아간다는 것은 실상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⑤범인의 습격 장면에서, 관객 중 여성과 남성의 반응의 차이가 확실히 있었을거라 예상된다. 남성들은 수풀 속에서 엄습해오는 검은 그림자에 음향효과와 더불어 단지 '깜짝 놀랄' 뿐이었겠지만, 뇌수까지 경직되는 듯한 그 뿌리깊은 진짜 공포는, 오직 여성들만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⑥조금 먼 얘기지만, 나는 다분히 정치적인 타입의 인간임에도 대 사회 정의와 이념에는 관심이 없다. 사회의 평등과 정의의 실현 보다도, 오늘 내 접시에 담긴 양배추 스프에 들어간 소세지의 양이 나와 사회적 기여도가 비슷한 인간과 평등히 같기만 하다면 실제 나는 사회적 불평등 구조와 잘못된 정의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결국 자신의 안위를 위해 움으로 들어가는 벌레와 별반 다를게 없긴 마찬가지로- 슬픈 일이다.

  ⑦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감독의 발견'을 했었다.(봉준호)
두번째 보았을 때, '도구의 발견'을 했었다.(섬세한 소품,음악,조명,장소선정)
세번째 보았을 때, '비애의 발견'을 했었는데-.

사실, 이 영화를 네번에 걸쳐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는 제대로 된 어떠한 글도 쓸 수가 없다. 지나치게 몰입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솔직히 네번째 보았을 때는 줄곧 울다가 나왔기 때문이었는데.

내 집의 셔터 내리는 풍경이 왜 그리 비참해 보였을까.
장애인을 구타하고 고문하여 허위진술을 받고 증거조작을 하는 무능한 경찰 보다도
여자의 속옷으로 살해현장에서 자위행위를 하던 변태(역시, 소수자) 보다도-
-벌레처럼 새앙쥐처럼 재빨리 움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더 가련해보였다.

생쥐처럼 자기 움에 숨어 불을 끄던 나나 당신이 그들보다 나을 건 무어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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