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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11 경향과 동아의 뒤바뀐 운명 (1)
  2. 2008/06/09 Messenger.

경향과 동아의 뒤바뀐 운명

1. 경향과 동아의 뒤바뀐 운명

(전략)

지난 3일 밤 9시쯤 경향신문 편집국은 술렁거렸다. 밖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함성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신문로를 가득 메운 수천여명의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경향신문, 힘내라’를 연호했다. 늦은 시각, 다음날 자 신문을 만드는데 여념이 없던 사원들은 가슴이 차오르는 흥분과 감동을 느꼈다. 한 기자는 “그날 밤 경향신문 기자라는 게 너무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중략)

경향의 이런 오늘은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참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두환 정권이 그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87년, 경향은 사실상 ‘민정당 기관지’ 역할을 했다. 신문 1면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사진이 일상적으로 실렸고,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과격 폭력시위’로 규정됐다. 당시는 경향신문 사장에 청와대 비서관 출신 등이 낙하산으로 내려오던 시절이었다.

그런 아픔은 경향의 집단적 기억으로 남았고, 신문의 본령을 지켜내야 한다는 기자들의 공감으로 이어졌다. 기자들은 그해 가을 언론자유수호문을 채택했고, 88년 3월 언론자유 기치 아래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런 정신은 경제적 어려움에서도 경향이 지난 10년간 ‘독립언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올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최근 2~3년 사이 경향신문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고, 최근 쇠고기 정국에서 미래를 맡겨도 좋을 신문으로 평가받는 것도 이런 연장선이다.

(중략)

박군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들끊는 민심은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선언’으로 더욱 확대됐다. 동아는 박군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 고위간부들에 의해 축소 은폐 조작됐다는 사실을 5월22일과 23일자 지면에 연달아 폭로했다. 이 보도는 박군 고문살인 은폐조작에 대한 범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6월10일 전국규모의 규탄대회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동아일보 기자 1백32명은 5월25일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주장’이라는 제목의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정권의 비도덕성에 대한 동아의 집요한 보도에 대한 보상일까. 동아는 ‘6·29선언’이 발표된 날 서울시내 가판에서만 40만2천8백부라는 경이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또 특별취재반(김차웅 차장대우 황호택·윤상삼·황열헌·임채청 기자)은 그해 한국기자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2008년 6월, 동아일보는 조선, 중앙일보와 함께 ‘믿을 수 없는 신문’으로 폄하되는 수모를 겪고 있다. 집회도중 시민들은 ‘동아일보 불 꺼라. 동아일보 폐간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우려를 괴담으로 치부하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지는 촛불집회를 친북좌파세력의 선동으로 몰아가는 일련의 보도들 때문이다.

(후략)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View.html?idxno=17701

2. 성숙
땅값을 위해서라면 도덕이나 윤리에 대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한순간이라도 고민없이' 순식간에 영혼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 이 나라 국민들의 정신줄 놓은 노망끼에 대해 지난 대선 이후 내부적으로 완전한 포기를 선언해버린 상태지만(이 후 총선결과는 놀랍지도 않았다. 노망들었는데 무슨 희망이 있겠냐.)

바로 어제

6.10 행사로 느낀 그 놀라움에 대해서는

아마 수십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인구에 회자할 수 있을 것 같다.


구제불능의 답이 없는 꼴통끼와
세계에 유례없는 성숙한 시민정신이
어떻게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는지
이 나라 국민들은 볼수록 참 신기한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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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triever 2008/06/11 23:48 PERMANENT LINK DELETE/MODIFY REPLY
    돌아다니다 공감이 가는 글이 있어 남깁니다. 경향과 동아의 뒤바뀐 운명도 운명이지만, 사견을 적어놓으신 부분은 제 마음과 똑같네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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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senger.

일년에 한두번 정도 미칠 듯이 그리워져서 듀스의 시디를 꺼내 듣는다. 가요를 거의 듣지 않는 내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인 듀스는 내겐 일종의 항우울제 같은 존재다.

나는 듀스의 시작부터 그 끝까지 이현도의 음악적인 팬이었다. 그러나 너무 '완벽'한 조건에다 어딘가 인간적으로 끌린다고 말하기는 정말 힘들었던 현도, 그에 비해 김성재는 참 착하고 조용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듀스의 활동기에 나는 인간적으로 훨씬 끌리던 김성재의 팬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 기 한번 죽지 않고 성장해 밝고 자신감 넘치고 반짝이는 재능으로 충만했던 '왕자님' 타입의 이현도에 비해, 김성재는 서민가정에서 태어나 말이 없고 수줍음을 참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그 흔한 자기PR조차 용인되기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지만, 자신감과 타고난 재능과 젊음의 오만함으로 전신으로 빛을 내는 이현도 뒤에서 김성재는 항상 존재감 없이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면 늘 그늘에 묻혀 버리던 김성재, 매체와의 인터뷰 마다마다 진솔하게 애정이 넘치는 PR로 성재의 존재를 부각시키려 정말 애쓰던 현도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의 듀스 팬이었다면 이현도의 김성재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었는지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각종 루머와 불화설과 함께 듀스가 잠정해체 했을 때, 두 사람이 언젠가는 처음의 시작과도 같은 형태로 다시 돌아오리란 걸 믿어마지 않았었고, 이현도의 음악으로 날개를 달고 나타난 김성재의 솔로 음반은 그 연장 선상이었기에, 그 날개를 채 펴지도 못한 어느 추운 겨울날, 성재의 불의의 사망(타살)소식은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의 쇼크였다. 나의 경우 그의 죽음을 개인적인 충격으로 까지 받아 들이지는 않았지만ㅡ이미 내 눈물은 1993년 리버 피닉스가 약물과용으로 급사했을 때 강처럼 흘렀고 이듬해 커트 코베인이 권총 자살했을 때 완전히 메말라버렸다ㅡ그가 나, 그리고 우리의 곁을 떠난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감상에 젖을 정도로는 그를 사랑했었던, 것 같다. 음악적인 면에서 한국 대중 음악사의 한 줄기를 바꿔놓은 현도의 '하늘이 내린 선물(gift)'을 사랑했다면 듀스의 '눈에 보이는 형태'를 만들어준 성재는 그 선물을 내게 전해준 messenger 같은 존재였다.

성재가 살아 있었다면 나보다 나이가 많았을 텐데, 그는 이젠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스물 세살로 남아 있다.

이젠 나보다 먼저 떠난 어떤 사람들 보다도 더 나이를 먹어버린 나.
먼저 떠난 그는, 또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쯤에 가 있을까.




듀스「우리는」



김성재「말하자면」
(솔로데뷔 첫 무대. 사망 전날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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